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 같다. 그간 새로운 회사에 잘 적응하면서 행복하게 잘 지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상사로 인해 화가 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잊을만하면 지랄하는 상사 어떤데
대가리꽃밭 극 P 상사
나의 상사는 극 P이며 대가리가 꽃밭이다. 뭘 제시간에 미리미리 계획하고 정해서 의사결정을 하는 법이 없으며 명확한 디렉션을 정확히 전달하는 법 따위 없이 본인 머릿속에서만 생각해 놓고 나중에 왜 이게 안 되어 있냐며 팀원들을 나무라는 스타일이다. 뭘 하자고 일을 벌릴 때는 예상되는 문제점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일을 벌려 놓고 봐서 팀원들이 수습하느라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모르면 좀 가르쳐 주면 되잖아요
우리 팀에 지금 팀장이 없어서 나 혼자서 거의 실무+팀장의 영역을 하고 있다. 당연히 미숙하다. 그래서 일을 명확히 파악하고 실수를 방지하려고 clarifying question들을 많이 하는 편이다. 명확한 컨센서스 후에 실수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근데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 되나, 좀 알아서 해와라, 왜 이걸 모르나 이런 식으로 나온다. 아니 시발 내가 그걸 다 할 줄 알면 지금 팀장이지 이러고 있겠어요?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보세요. 팀장 없이 주니어가 업무 스트레치를 하는 상황은 팀에서도 물론 답답할 수 있으나 내 입장에서도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아니 매니저가 괜히 매니저인가? 내 월급은 매니저가 아닌데 매니지를 해야 하는 상황, 이런 상황조차 모든 게 언제나 이상적일 수는 없으니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필요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씩씩하게 하고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거나 이걸 왜 생각을 못해? 같은 븅신같은 말을 들으면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사기만 떨어지는 건 아니고 빡이 치고 좆같네라는 생각도 들고 퇴사 욕구도 든다.
좀 평화롭고 아름답게 일하고 싶다
갑자기 당일에 이거 하라고 해서 다른 팀에 수도 없이 양해 구하고 사과하는 일 좀 그만 하고 싶다. 디렉션을 줄거면 최소한의 계획과 집행이 가능한 시간은 두고 미리미리 주던지 아니면 정 그렇게 급하게 하고 싶으면 본인이 다 양해 구하고 책임져서 했으면 좋겠다. 매사에 저렇게 갑자기 오늘 이거 하라고 하고 앉아있으면 진짜 한 치 앞 미래라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금붕어인가 싶고 개빡친다. 계획이라는 개념을 모르나?
날것의 감정을 보이는 건 하수다
일을 할 때 날것의 부정적인 감정을 보이는 사람은 하수라고 생각한다. 특히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 화를 낸다는 건 본인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이 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스스로 머리를 써서 생각하고 준비하고 필요한 리소스를 활용하고 사람들을 설득해서 만들어 내는 게 멋진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소리지르며 화 내는 것, 심지어! 그것이 한~~참 연차가 어린 아랫사람이라면! 하하하! 쌉하수. 꼴이 우습고 몹시 애새끼같고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점점 인간 자체를 도저히 존경할 수가 없어지고 정이 떨어지기만 한다.
하지만 상사를 손절할 수 없는 비극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할 때의 가장 큰 비극.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고 직장에서는 그게 상사다. 꼬우면 옮기면 되는 일인 것도 사실이나 옮기기까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고 리스크도 감수해야 한다. 예의없거나 내 기준에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은 그냥 거리두거나 손절하면 그만인데 상사는 손절할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이 직장생활의 비극이며, 나를 불안하게 하는 부자유이며, 직업인으로서의 지향을 더 공고하게 하는 요소이다.
상사가 빡치고 퇴사하고 싶을 때 대처법
심호흡, 물, 마그네슘, 초밥, 명상음악, 감정 쓰기
모두 내가 오늘 한 것들이다.
우선 심호흡: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셔서 배가 올라오도록 하고, 입으로 후 하고 길게 뱉는다. 나는 필라테스를 했던 때의 습관으로 평소에도 흉식호흡을 하는 편인데 필라테스 호흡법이 숨을 깊게 들이쉬지 못하게 해서 별로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후로는 스트레스 받을 때나 생각날 때 복식호흡을 충분히 하려고 노력한다.
물을 마신다.
우리는 항상 탈수 상태이다. 만약 당신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물을 마시는 것은 스트레스랑 바로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건강에 좋다.

마그네슘
나는 차분하고 침착한 편이라 감정이 격해지는 일이 별로 없는 편인데, 이렇게 화가 막 나고 개빡칠 때는 물론 상황도 상황이겠지만 바이오리듬상 모든 게 불쾌한 시기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시기라는 걸 며칠 전부터 주지하고 있었다. 원래 몸에 마그네슘이 부족한 편이라 챙겨먹는 편이지만 이럴 때는 더더욱 잘 챙겨먹고 바나나도 먹어주고 하는 것이 좋다. 잠도 잘 오고 몸의 긴장을 풀어주며 근육통을 줄여준다. 먹는 김에 올리브오일이나 오메가3도 같이 먹어주면 좋다.
초밥
배달음식을 자주 시켜먹는 편은 아닌데 금요일에는 종종 시켜먹는다. 한 주간 고생한 나를 치하하는 의미에서다. 일종의 스스로를 위한 리워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최초로 월요일부터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다. ㅋㅋㅋ 지하철에서 아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까 몇 가지 생각해 보다가 초밥을 떠올렸고 다 먹은 지금 꽤 괜찮은 생각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초밥은 언제나 맛있네. 장어 맛있었다. 다음에는 우니도 먹어야지.
명상음악
오늘 저렇게 불쾌하고 화가 난 상태로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타는데 진짜 사람이 너무너무 많아서 더 개빡쳤다. 그래서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애플뮤직 검색창에 "이너피스"를 쳤다. 그랬더니 "이너 피스를 위한 음악"이라는 앨범이 나왔다. POZAlabs라는 아티스트다. 계속 듣고 있는데 참 좋다. 속이 시끄러울 땐 아무리 좋아하는 노래여도 사람의 목소리 자체가 시끄럽고 성가시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물소리나 명상음악, 이너피스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서 들으면 좀 마음이 그나마 가라앉는다. 집에 오는 길에 쭉 이어폰으로 듣고 와서도 스피커로도 몇 시간째 계속 틀어놓고 있는데 확실히 명상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조용하고 평화로워지는 기분이라서 좋다.
감정 쓰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덤블도어가 펜시브에 생각 풀어내듯 나도 내 감정을 풀어낸다. 어떤 감정이고, 어떤 일이 있었고, 왜 그런 감정이 들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에 대해. 보통 이 주제로 머릿속에서 수많은 혼잣말을 하지만 아무래도 생각만 해서는 쉽게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글로 쓰는 것이 확실히 명료하게 정리가 된다.
나는 꽤 감정에 취약한 사람인 것 같다. 평소에 감정이 별로 격하지 않고 차분하고 이성적인 편이라서 외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나 파도가 있을 때 더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 같다. 감정은 컨트롤이 잘 되지 않으니까. 글쓰기는 그럴 때 좋다. 차분하게 정리해서 풀어내서 정화를 얻는다. 지금 좀 평화를 얻었다.
또 효과적인 것들: 샤워, 빨래, 미룬 일, 다림질
이것들도 내가 오늘 한 것들인데,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서 피로를 쭉 씻어내고 풀어내면 좋다. 마음이 깨끗해진다. 그리고 밀린 빨래를 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간 미뤄 뒀던 청소나 주변 정리를 하면 성가시고 귀찮지만 내 자신을 더 깨끗하고 안정된 환경에 둘러쌓이게 할 수 있다. 다림질은, 사실 평소엔 너무 귀찮고 성가셔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미루는 일이긴 한데, 가끔씩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해서 하면 명상하는 것마냥 마음이 비워지고 마음의 구김도 같이 펴지는 느낌이 든다.
화가 날 때 회사에서 하기 좋은 대처법들
자리 뜨기, 정시퇴근하기
감정이 격해지려고 하거나 할 때 가능하다면 일단 그 자리를 뜨는 것이 좋은 것 같다. 화장실이나 계단에 가서 심호흡도 하고 스트레칭도 하고 욕도 육성으로 하고 메모장에 휘갈기기도 하고 그러면 좀 낫다. 같은 맥락에서,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일을 해봤자 효율이 별로 좋지 않으므로 가능하다면 일이 조금 남아있더라도 야근을 하기보다는 빠르게 퇴근하고 귀가하여 셀프 힐 후 다음 날의 생산성을 도모하는 게 낫다.
그 상사랑 점심 같이 안 먹기
일하는 시간에는 그냥 내 모니터 보고 일을 하면 되는데, 누가 싫어지면 그 사람이랑 점심을 먹거나 하는 개인적인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하는 게 의외로 고역일 수 있다. 내 경우 점심만 같이 안 먹고 혼자 쉬다 와도 좀 낫더라. 혼자 나와서 먹고 싶은 거 맛있는 거 먹으면 상당히 힐링이 된다. 약속이 있다고 하고(자신과의 약속임) 나와서 먹고 산책을 좀 하자.
연차쓰기
잠시 상황과 거리를 두는 방법의 하나로 연차를 쓰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그것도 수요일 막 이런 뜬금없는 때. 그리고 아무 날도 아니어야 함. 어떻게 보면 제일 진빠질 때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으니 회사에 꾸역꾸역 가야 하는 날에, 연차를 쓰고 늦잠자고 어슬렁어슬렁 좋아하는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요리해 먹고 일기 쓰고 이불 푹 덮고 자고 그러면 하루만 쉬어도 에너지가 많이 충전된다. 그리고 뜬금없는 날에 쓰는 연차의 또 다른 장점은 유치한 발상일 수 있긴 한데 그 좆같은 상사로 하여금 '면접보나?'라는 일말의 불안감의 씨앗을 심어줄 수 있다. (물론 불안감이 들게 하려면 평소에 내가 엥간치 일인분 이상은 해서 팀에 필요한 존재이기는 해야 한다)
모두가 저 상사를 좆같아한다는 점을 떠올리기
난 이게 제일 효과적이더라. 좆같은 사람들의 특징은 매우 당당하고 자신이 좆같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잘못됐나?'라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나도 어디가서 쉽게 말려드는 성격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레벨이 높은 빌런은 괜히 레벨이 높은 게 아니다. 그럴 때 나는 저 상사의 악명과 저 상사와 일한다고 하자 '괜찮아..? 괜찮겠어..?'라고 물어봤던 사람들과 저 상사와 일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던 동료들의 말을 떠올린다. (모두 각각 다른 사람들임) 기회가 된다면 동료들과 뒷담화를 좀 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물론 너무 원색적으로 말고 감정만 간단히.
이직 욕구를 불태우거나 N잡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 언급했던 사회인∙직장인으로서의 부자유, 생계를 위해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의존해야만 하는 이 불안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뭐라도 하면 좀 도움이 된다. 이직 준비를 한다거나 실제로 지원을 한다거나, N잡을 하고 있다면 나태했던 평소에 비해 조금 더 열심히 해 보거나. 알을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불안감도 덜해지고 실제로 그 상황을 탈피하는 데도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
마인드 컨트롤: 다행인 점과 감사한 점들
상황이 가끔 좆같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감사하고 다행인 점들이 여럿 있다.
곧 월급날임
곧 월급이 들어온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배당주 더 사야지..)
퇴근을 할 수 있음
지금 다니는 회사는 대체로는 정시퇴근을 할 수 있다. 일이 너무 많아 퇴근을 절대 못하고 하더라도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거의 방탈출 수준이던 전 회사보다 훨씬 낫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
가족들을 생각하면 좋다. 주말에 오랜만에 집에 가서 가족들을 보고 어제 돌아왔는데 오늘 벌써 엄마가 보고 싶었던 건 함정이지만.. 엄마가 준 과일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깨끗이 씻어서 먹고 하면서 엄마의 사랑을 떠올린다. 아빠의 마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리는 겨울에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지. 계획을 내가 짜야 하기는 하지만 즐겁게 할 수 있다.
상사가 표독스러운 건 아님 (좀 멍청하긴 하지만)
전 회사에서 느낀 건 나는 표독스러운 상사는 절대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멍청하고 가끔 나한테 지랄하지만 그래도 본바탕은 착한 상사가 낫다. 지금 상사가 좀 나잇값을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 내가 더 잘 해서 저 사람하고도 일이 되게 만드는 능력을 갖추면 그 어딜 가서든 난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 받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겠지만 내 인격을 수양하고 능력을 향상시키는 기회로 삼자. 그런 면에서 표독스러운 상사는 나는 절대 그냥 참을 수가 없더라. 멍청하더라도 착한 사람이 나와는 잘 맞는다. 상황이 더 나쁘지 않은 걸 감사하자.
퇴사지망생의 마인드 컨트롤 일기 끝
참으로 길게도 풀어 썼다. 그래도 좀 개운해지는 것 같다.
오래 앉아 있었으니 이제 마치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좀 하려고 한다. 그럼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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